[경남/함양] 시집과 함께한 걷기여행 '함양 선비문화탐방로 1코스'

2019-09 이 달의 추천길 2019-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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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따라 옛 선비들의

풍류가 녹아든 길

'경남 함양 선비문화탐방로

1코스'

강민지 여행작가




염이 지나간 자리에 선선한 바람이 스미기 시작하는 이맘때 여유 부리며 걷기 좋은 길이 있다. 함양 남덕유산 자락의 화림동 계곡을 끼고 걷는 선비문화탐방로 1코스. 옛 선비들이 경치 좋은 자리마다 정자를 짓고 계곡물소리를 벗 삼아 풍류를 읊던 곳이다. 시집 한 권 들고 옛 선비들이 드나들던 길을 따라나섰다.


계절의 들머리에 서서 한숨 돌리고 보니 문득 시집을 펼쳐본 지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만의 여유를 부려본 지도 오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서 시가 멀어지고 있다"라는 문구에 이끌려 오랜만에 시집 한 권을 골랐다. <시를 잊은 나에게>. 지금 내게 꼭 필요한 소박한 선물 같은 책이다. 자연에 푹 파묻혀 여유롭게 거닐다 시 한 수 마음에 새길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더없이 좋겠다.

자연에 머물며 풍류를 읊던 곳


함양 선비문화탐방로 1코스는 물 맑은 계곡을 따라 너럭바위와 정자가 늘어선 길이다. 걷는 데만 집중하기보다 틈틈이 앉아 시집을 펼쳐들고 사색을 즐기기 좋다. 화림동 계곡은 예부터 ‘팔담팔정(8개의 못과 8개 정자)’이라 불리던 곳으로, 선비문화탐방로 1코스는 이 물길을 따라 약 6km 이어진다. 지금은 8개의 정자를 모두 볼 순 없지만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 농월정 등이 남아 계곡의 풍취를 더한다.

 




출발점은 서하면 봉전마을 정류장에서 가까운 거연정이다. 자그마한 아치형 다리로 이어진 거연정은 옥빛 소와 기암괴석이 빚은 절경 한가운데 우뚝 서 있다. 1640년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전시서가 억새를 엮어 정자를 세웠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남았다. ‘자연에 머문다’는 뜻처럼, 정자 안에서 내다보는 풍경보다는 멀찍이 떨어져 자연과 한 몸인 양 어우러진 모습을 바라보는 맛이 더욱 좋다.


거연정에서 다시 도로로 빠져나와 물길을 오른쪽에 끼고 150m쯤 가다 보면 너럭바위에 얹히듯 서 있는 아담한 정자가 나타난다. 1802년, 함양을 대표하는 선비 일두 정여창 선생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지은 군자정이다. 군자정 옆 봉전교를 건너 좌회전하면 울울한 나무 그늘이 드리운 덱길이 시작된다. 세차게 따라오는 물소리에 귀를 활짝 열고 찬찬히 걸음을 내디뎠다.

시집과 동행하기 좋은 길


10분쯤 걸었을까. 길은 이내 덱을 벗어나 2차선 도로로 접어든다. 동호정까지 1.1km 남았음을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가다 보면 사과밭이 지천인 농로를 만난다. 땡볕이 내리쬐는 농로를 지나 둑길을 따라 걷다 보면 키 큰 나무가 늘어선 숲이 반갑게 맞아준다.


이어 알싸한 냄새를 풍기는 상수리나무 군락 아래 솔가지와 낙엽이 푹신하게 깔린 흙길이 이어진다. 땀에 젖은 모자를 벗어던지고 걸음을 멈췄다. 계곡과 마주한 벤치에 앉아 그제야 시집을 꺼내들었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중



학창시절 한껏 들뜨게 했던 시를 이 길에서 다시 읽으니 새삼 반갑고, 시 한 줄에 설렐 수 있는 이 시간이 참 고맙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라고 노래한 시인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한가로움이 듬뿍 묻어나는 쉼터


숲길을 조금 더 지나 철제 계단을 내려서면 유순한 물가 풍경을 굽어보고 있는 정자 한 채가 건너편에 보인다. 화림동 계곡에서 가장 화려하고 큰 정자인 동호정이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등에 업고 수십 리를 달려 피난길에 올랐던 동호 장만리 선생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다. ‘해를 가릴 만큼 넓은 바위’라는 뜻의 차일암이 풍경의 멋을 거든다. 개울 아래쪽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면 동호정에 닿는다.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동호정 풍광도 충분히 좋지만 정자에 올라 한가로운 경치를 즐기며 쉬어 가도 좋겠다.



동호정을 지나면서부터 길은 조금씩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벼가 익어가는 농로와 과수원 길, 한갓진 농촌 풍경을 간직한 호성마을을 통과해 경모정, 람천정을 차례로 지난다. 경모정과 람천정은 화림동 계곡의 다른 정자들에 비해 최근에 지어진 정자지만 조용히 사색에 빠져들기에 손색이 없는 풍경을 품고 있다.


람천정 앞 개울 너머로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일기예보에는 분명 비 소식이 없었는데. 일단은 조금 더 걷기로 한다. 10분쯤 걷다 결국 소나기를 만났고 길을 돌아와 람천정에서 비를 그었다. 빗줄기가 거세질수록 애가 탔지만 그 덕에 시 한 줄 더 읽고 갈 시간을 벌었다며 나를 토닥였다.


빗줄기가 잦아들 때쯤 정자에서 빠져나와 황암사 방면 임시 통행로로 길을 잡는다. 황암사까지 1.4km 이어진 길에서 울울한 소나무 숲을 만났다. 솔향을 가득 들이마시며 걷다 한 번씩 뒤돌아보면 유유히 흐르는 남강과 산자락이 나를 따라 걷고 있다. 솔숲이 끝나는 길에 도로를 건너면 황암사에 닿는다. 황암사는 정유재란 때 왜적과 싸우다 순국한 선열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조금 전 만난 풍경을 먼 발치에서 내려다볼 수 있으니 잠깐 들러도 좋겠다.

무릉도원 같은 풍경에 취하다


이제 선비문화탐방로 1코스의 종착지인 농월정까지 0.7km 남았다. 구불구불한 2차선 도로 구간이 있어 조심히 걸어야 한다. 도로를 벗어나 계곡 산책로를 따라 들어서는 길, 멀리 농월정이 눈에 잡힌다. ‘한 잔 술로 달을 희롱한다’는 멋스러운 이름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1,000평이 넘는 너럭바위가 계곡과 어우러져 기막힌 경관을 빚어냈다.


농월정은 조선 중기 학자 지족당 박명부가 1638년에 지은 정자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결사항전을 주장하다 인조가 결국 항복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은거했다. 안타깝게도 2003년 화재로 전소됐다가 최근 복원되어 옛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농월정을 둘러싼 풍경만큼은 그대로다. 정자 앞의 거대한 너럭바위에는 ‘화림동 월연암(花林洞 月淵岩)’이라는 글씨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달이 비치는 바위 못’이라는 뜻처럼 달빛 환한 밤이면 더욱 운치 있겠다.

계곡 아래쪽에는 농월정으로 이르는 다리가 놓여 있다. 농월정 누마루에 올라 앞마당처럼 펼쳐진 계곡 절경을 마음껏 누렸다. 정자 옆에는 ‘지족당선생장구지소’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지족당 박명부가 지팡이와 신발을 끌며 산책하던 곳. 여기야말로 무릉도원이다.


▶︎걷는 시간

1시간 30분

▶︎걷는 거리

약 6km

▶︎걷기 순서

거연정~군자정~영귀정~다곡교~동호정~호성마을~경모정~람천정~황암사~농월정

▶︎코스 난이도


▶︎걷기 TIP

- 길의 2/3가 숲이 울창한 데크길이지만 중간중간 농로와 아스팔트를 지난다. 땡볕을 피할 선크림과 모자는 필수다.

- 동호정, 람천정, 농월정 주변 계곡은 수려한 경치를 감상하며 탁족을 즐기기 좋으니 샌들을 챙겨가길 권한다.

- 선비문화탐방로 1코스는 출발점부터 도착점까지 26번 국도와 나란히 이어진다. 안의면이나 함양읍으로 가는 버스가 1시간에 2대씩 지나가니 비상시에 가까운 버스정류장으로 빠져나가면 된다.

▶︎화장실

거연정 초입, 영귀정 근처, 경모정 근처, 황암사 초입, 농월정 유원지

▶︎음식점 및 매점

도착점인 농월정 주변에 식당과 매점이 있다. 도착점까지 간식과 식수를 구할 수 없으므로 안의시외버스터미널 주변에서 넉넉히 준비해 가는 게 좋다. 안의면은 갈비찜과 갈비탕이 유명하니 출발하기 전에 배를 든든히 채워도 좋겠다.

▶︎숙박 업소

다볕자연연수원, 개평한옥마을 일두 고택, 함양 시외버스터미널 주변 모텔 및 호텔

▶︎교통편

-자가용 : 네비게이션 거연정(주소 :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육십령로 2590)

-대중교통 : 서울 남부터미널-안의터미널(1일 11회 운행), 안의터미널에서 서상행 군내버스를 타고 봉전마을 정류장에서 하차.

▶︎문의

055-960-5162 (함양군청 문화관광과)

▶︎길 상세보기

글, 사진 : 강민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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