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파주] 옛 학자의 흔적을 찾아, 책 읽으며 떠나는 걷기여행 '평화누리길 8코스 반구정길'

2019-09 이 달의 추천길 2019-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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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마음으로 걷는 길

'평화누리길 8코스 반구정길'

박산하 여행작가


름의 끝, 조선 시대 16세기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정치가인 방촌 황희 선생과 율곡 이이 선생의 흔적을 따라 걸었다. 황희 선생이 여생을 보냈던 반구정과 율곡 선생이 시를 지었다는 화석정은 몇백 년이 흘러도 평화로운 시간을 간직하고 있었다. 둘 다 유유한 임진강을 끼고 있어 반짝이기도 고요하기도 했다. 길 위에 오르자 따사로운 볕 아래,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들판 사이에서 가을의 기운이 느껴졌다. 책 한 권을 들고 풍경과 문장에 기대어 걸으니 따뜻한 시간이 조금씩 팽창한다.


여름이 빠져나간 자리, 마음에 서늘함이 들어설 준비를 해둔다. 진초록 여름 풍경 하나 간직하는 것, 따뜻하고 보드라운 문장을 기억하는 것. 여름이 완전히 가기 전, 따뜻한 무엇인가를 마음에 저장해 놓아야 한다. 풍경과 문장을 고르기 위해 책 한 권과 길을 나섰다. 이곳엔 아직 미미한 여름이 남아있다.

평화누리길은 경기도 김포와 일산, 파주, 연천까지 12코스 길로 이뤄져 있는데 8코스는 임진강을 끼고 있는 파주의 한 귀퉁이를 걷는다. 낯선 길 위, 든든한 동행자로 김애란 작가의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이란 책을 꺼냈다. 처음 이 책을 만났을 땐 한여름이라 <잊기 좋은 ‘여름’>이라고 흘리듯 봤었다. 그래서 꺼낸 책이었는데, 잊기 좋은 ‘이름’이란 속 깊은 제목에 매료되었다. 따뜻한 글을 쓰는 김애란 작가의 문장들은 길 위에서 오래 멈춰 서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시간이 흘러가거나 사라지는 게 아닌, ‘팽창하는’ 줄도 모르고 빠져들었다. 그녀의 긴 문장이 긴 길과 나란했다. 책의 제목은 반어법, 세상에 잊기 좋은 이름은 없다는 김애란 작가. 역시 잊기 좋은 여름도 없었다. 여름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심정으로 평화누리길 8코스 반구정길을 나섰다.

방촌 황희 선생을 생각하는 반구정



평화누리길 8코스는 반구정에서 시작한다. 반구정은 하나의 아담한 공원을 이루는데, 정자 주변으로 오래된 나무와 문화재가 함께 한다. 황희 선생 하면, 안동의 도산서원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이곳도 선생과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황희 선생은 관직에서 물러나 87세가 되어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는데,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정자를 지어 놓고 풍경을 바라보며 쉬었다고 전해진다.

반구정(伴鷗亭)의 뜻은 갈매기를 벗 삼는 정자라는 의미. 예로부터 이곳에 갈매기들이 많이 모여들었단다. 황희 선생은 이곳에서 3년 정도 은거하다 세상을 떠나셨다. 160년이 지나 허물어졌던 반구정을 다시 지었는데, 1665년 조선 시대 중기 선비였던 미수 허목 선생이 쓴, 이곳의 풍경을 세세하게 써 내려간 <반구정기>를 통해 복원했다. 그의 글에는 썰물이 물러가고 갯벌이 드러날 때마다 갈매기가 모여든다고 쓰여 있다.


반구정에서 바라본 풍경은 평화로웠다. 맑은 날이면 개성의 송악산도 보일 듯하다. 철조망이 둘러쳐 있긴 하지만 황희 선생이 온 힘을 다해 관직에서 보냈던 그 고생스러운 마음을 다독이고, 풍경에 온전히 기대어 쉴 수 있었을 듯싶다. 반구정보다 조금 더 놓은 곳엔 양지대가 자리한다. 반구정의 원래 자리가 이곳이라 전해진다.

황희 선생은 고려 시대에서부터 조선 시대 세종에 이르기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다. 30세부터 87세까지 68년 동안 관직에 있었는데. 오랜 세월 그곳에 있었으면서 좌천과 파직 등을 겪었고, 강직한 성품으로 다시 복직되거나 임명되었다. 특히 세종이 가장 신임하는 신하였으며 검소한 생활과 좋은 인품으로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유적지 내 황희 선생의 이야기를 살펴보며 이 시대에도 이런 분이 계시길 간절히 바라본다. 황희 선생의 시간이 멀어진 것이 아니라, 팽창했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도 이분의 마음이 면면히 이어져 온 것 보면.


‘시간은 흘러가거나 사라질 뿐 아니라 불어나기도 한다.’

-<잊기 좋은 이름> 중

지금의 이 풍경을 바라보는 것도, 황희 선생을 알아가는 것도 분명 시간이 흐르는 일이지만, 사라지는 것이 아닌 불어나는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마음이 허전할 때면 풍경을 곁에 두고 책을 읽으며 시간을 차분히 채워 나가는 것이 아닐까.

반구정

-위치: 경기 파주시 문산읍 반구정로85번길 3

-전화번호: 031-954-2170

-관람시간: 3~10월 09:00~18:00, 11~2월 09:00~17:00(월요일 휴무)

-관람요금: 어른 1,000원/ 어린이 및 청소년, 경로 500원



황희 선생 유적지를 나와 따사로운 볕을 따라 본격적으로 걷는다. 언덕을 오르다 보면 길가에 꽃이 피어있고, 너른 평지를 만나면 벼들이 조금씩 황금빛으로 바람에 쓸려나간다. 임진강을 지나면 다시 시골길 풍경이 이어지고, 마을을 만나면 낮은 지붕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나무 아래 어디서나 쉬어갈 수 있고, 그곳에 풀썩 앉아 책을 펼친다.



한참을 걸었을 때, 나지막한 산이 앞에 놓였다. 동네 뒷산을 오르는 기분으로 가뿐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꼭대기에 오르자 장산 전망대라고 쓰여 있다. 이곳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텐트들이다. 장산 전망대는 숨겨 놓은 오지 캠핑장으로 알음알음 알려져 있다. 캠핑을 위한 시설이 마련되지 않았기에, 머물렀다 간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자연에 대한 배려가 필요한 곳이다.


전망대는 임진강의 전경과 개성의 송악산, 장군봉 등 북한의 풍경도 어렴풋 보인다. 그리고 강 한가운데 떠 있는 평화로운 섬, 초평도를 내려다볼 수 있다. 풀이 무성하게 자라 평평하다고 붙여진 섬이다. 섬 전체가 민통선 북쪽에 위치해 사람이 오갈 수 없어 멸종 위기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는, 습지 생태계의 보고다. 흰꼬리수리, 도요, 파랑새, 청호반새 등이 드나들고 사시나무와 갯버들 군락이 섬을 채운다.

잠시 벤치에 앉아, 임진강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책장을 넘겨본다. 마음에 맞는 친구를 만나는 순간처럼 책이 건네주는 대화가 반갑다.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그렇게 조금씩 '바깥의 폭'을 좁혀가며 '밖'을 '옆'으로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잊기 좋은 이름> 중

단번에 내면으로 들어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풍경도 사람도. 은근하게, 진득하게 걷고 사귀어야 하는 일이다. 내 반경을 조금씩 넓혀가는 일이 곧, 내가 걷는 이유이기도 하다.

율곡 이이 선생의 흔적을 찾아



전망대에서 내려와 쉬어갈 정자 하나를 찾아 나선다. 한참 산길을 걸었을까. 화석정(花石亭)이 등장하고, 그곳에 서니 임진강과 도로가 나란하게 뻗어 있다. 율곡 이이가 제자들과 함께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가 현종 14년(1673)에 후손들이 복원했지만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었다. 1966년 파주 유림이 함께 복원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사라지고 지어지기를 반복했지만, 정자 곁엔 560년 된 느티나무가 든든하게 서 있고, 곧게 뻗은 230년 된 향나무도 함께 한다.

이 정자엔 속 깊은 이야기가 스며있다. 율곡 선생은 틈날 때마다 이 정자에 들기름을 묻혀 닦도록 했다. 그리고 임종 때 어려울 때 읽어보라며 편지를 남겼다. 율곡 선생이 돌아가신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선조가 의주로 피난 가는 길에 이항복이 율곡의 편지를 열어봤더니,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고 쓰여 있었다. 기름칠해 두었던 정자는 금세 불길에 휩싸였고, 선조 일행이 밤중에 무사히 강을 건넜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율곡 선생의 깊은 뜻을 다시 새기며 마지막 길로 들어섰다.

화석정

-위치: 경기 파주시 파평면 화석정로 152-72

-전화번호: 031-952-9233

-관람시간: 09:00~17:00(월요일 휴무)

-관람료: 무료

모든 계절의 풍경을 품은 율곡습지공원

 


 

율곡습지공원은 가장 계절 다운 풍경을 볼 수 있다. 봄엔 청보리, 여름에 연꽃, 가을엔 코스모스가 활짝 피어난다. 작은 습지들이 곳곳에 있어 관찰하는 재미도 있다. 습지엔 부들이, 주변으로 밤나무가 자란다. 학자의 숲도 자리하는데 율곡 이이 선생을 기려 만든 곳이다. 학자의 숲엔 드넓은 잔디가 펼쳐져 있어 마음이 탁 트인다. 정자나 그네 벤치에 앉아 잠시 쉬어가도 좋다.

율곡습지공원에서 땀을 식히며 여름과 인사하고 가을을 맞이한다. 시들어가는 장미, 피어나는 코스모스를 바라본다.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시간이다. 해는 저물고 있고, 저 먼 곳에서부터 걸어온 시간들로 마음을 채운다. 다음 계절은 어떤 얼굴일까, 그 빈칸은 남겨둔다.








▶︎걷는 시간

3시간 40분

▶︎거리

13km

▶︎걷기 순서

반구정 -(3.0㎞/50분)- 임진강역 -(6.5㎞/100분)- 장산전망대 -(2.5㎞/50분)- 화석정 -(1.0㎞/20분)- 율곡 습지공원

▶︎코스 난이도

보통


▶︎걷기 TIP

-논밭을 지나는 길이 많이 있습니다. 그늘이 없으니 모자와 물을 준비하세요.

-차량 통행이 있는 길이 꽤 있습니다. 이동 시 조심하세요.

-인적이 드문 산길이 있으니 누군가와 동행하세요.

-유적지와 공원을 들르다보면 시간이 늘어납니다. 너무 늦지 않게, 넉넉하게 시간을 잡고 출발하세요.

▶︎화장실

반구정, 임진강역, 화석정, 율곡습지공원 총 4개소

▶︎음식점 및 매점

반구정 근처 음식점이 있으며, 화석정에 매점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교통편

경의선 문산역에서 마을버스 53번 탑승 후, 사목1리 반구정에서 하차.

▶︎길 상세보기

글, 사진 : 박산하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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