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여수] 정상에 오르지 않을 자유 여수 호랑산둘레길

2020-10 이 달의 추천길 2020-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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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오르지 않을 자유

여수 호랑산둘레길

글, 사진: 김정흠


서둘러 길을 나섰던 건 순전히 새벽녘의 공기가 나를 깨워서였다.

커튼은 단단히 여미어 두었지만, 창문을 열어두고 잠들었다는 걸 그제야 알아챘다.

부쩍 차가워진 바람이 내 콧등을 툭툭 두드렸다. 시큰했다. 커튼을 열어젖혔다.

아직 어둑어둑한 세상이 창문 너머로 펼쳐지고 있었다.

어느새 밤이 꽤 길어졌구나. 하고 생각했다. 가을이었다.


이번 목적지는 전라남도 여수 호랑산이었다. 신라의 화랑들이 무예를 갈고닦았던 곳이라 하여 과거 '화랑산'으로 불렸던 곳이다.

지금도 정상부에서 호랑산성이라는 성터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이 일대에서 삼국 시대의 유물이 발굴되기도 한단다.

지금이야 이 지역 주민들이 가볍게 오르내리는 동네 뒷산이기도,

여수산단과 그 너머로 펼쳐지는 드넓은 바다의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명소로 더 유명하지만.


호랑산에 도착한 것은 해가 떠오르고도 약 30여 분이 지난 후였다.

아직 새벽의 어두운 기운이 조금은 남아 있는 듯했지만, 구름 사이로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태양은 사방을 여지없이 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햇볕은 밤새 흙이 머금었던 습기를 끌어올렸다. 덕분에 적당히 촉촉한 숲이 적당히 신선한 공기를 마주할 수 있었다.





여수산업단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는 호랑산의 존재야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만, 이번에는 정상까지 오르지는 않기로 했다.

둘레길의 존재가 내게 정상에 오르지 않을 자유를 준 셈이었다. 발걸음이 가벼워질 수밖에 없었다.

13km라는 길이가 꽤 부담스러웠던 건 사실이지만, 대부분 완만한 경사로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남해화학사택아파트 옆에서 호랑산둘레길 입구를 만났다. 약간의 계단을 오른 후에는 줄곧 숲길이었다.

숲은 딱 한 사람만을 허락한다는 듯이 좁고 길게 오솔길을 내주었다. 나머지는 전부 숲의 차지였다.

누구를 만날 수도, 곁에서 함께 거닐 수 없다는 게 이상하게도 마음에 들었다.

오롯이 나와 호랑산 숲길 사이의 연결고리만 유효했다.


밤송이가, 낙엽이 오솔길 위에 떨어져 있었다. 벌써 앙상한 나뭇가지만 드러내고 있는 나무도 몇 그루 눈에 띄었다.

거참, 성질 급하기도 하지. 수납장에 여름 옷을 하나씩 개켜 넣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가을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느낌이 들게 하느냔 말이다.

여름과 가을 사이, 아니 그보다는 조금 더 가을에 가까운 숲을 거닐고 있자니 조금은 쓸쓸했다. 어느덧 올해도 3개월 남짓 남았구나.




그러나 그 감성도 잠시, 갑작스레 펼쳐지는 편백 숲은 다시 기분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약간은 톡 쏘는 듯하면서도 순수한 공기가 온몸을 감싸 안았다. 사방에 피톤치드가 가득했다. 이제는 어깨 높이로 떠오른 해가 숲을 한껏 노란빛으로 물들였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고, 발걸음도 빨라졌다. 고개는 까딱까딱, 어깨는 들썩들썩. 기어코 어린아이처럼 숲길을 내달리고야 말았다. 아무도 없는걸, 어때.

 






계속 나아갔다. 오솔길은 나를 점점 더 깊은 숲으로 인도했다. 편백이 이어졌고, 종종 상록수들도 눈에 띄었다.

남녘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풍경이었기에, 두 눈 가득 이 어여쁜 자연을 담아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문득 점점 주변 도로를 오가는 차량의 소음이 멀어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먼 발치에서 졸졸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들려왔다.

호랑산둘레길 숲에 한층 더 깊게 파고 들었다.









호랑산둘레길에는 쉬어갈 만한 곳도, 한껏 여유를 부리며 거닐어 볼 수 있는 길도 있었다. 편안했고, 폭신했다.

여차하면 중간에 둘레길을 벗어나는 것도 가능했다.

전혀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치솟은 나무들은 이 길을 더 몽환적인 분위기로 만들었다.

 

 






몇몇 나무들은 두 팔을 쭉 벌려도 껴안을 수 없을 만큼의 둘레를 자랑하기도 했다.

그런 거대한 나무들이 양옆에 도열해 있는 모습은 마치 숲길을 오가는 이들을 지켜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갑작스레 등장한 대나무 숲은 또 어찌나 포근했는지. 든든했다.






편백 숲 사이로 뻗은 임도를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별안간 길이 갈라졌다.

한쪽은 여전히 임도였고, 다른 한쪽은 다시 숲이었다. 호기롭게 택한 쪽은 숲.

이번에는 아까와는 다르게 돌무더기가 가득한 숲이었다.

사람이 많이 오가지 않았는지 잡초가 거의 내 발목 위쪽으로까지 자라나 있는 구간이 적잖이 등장하기도 했다.

괜히 이쪽 길을 택했나 싶었을 즈음, 호랑산 위쪽으로부터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계곡 줄기가 마음을 다독였다.

울창한 숲 사이로 새어 들어온 햇볕이 작은 웅덩이를 반짝이기도 했다.




호랑산 주변을 따라 한 바퀴 크게 도는 둘레길은 이제 막 절반을 지나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당분간 내리막 임도였다.

오랜만에 탁 트인 하늘을 마주했다. 연파랑 캔버스 위로 유성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감탄하지 않기에는 아직 내성이 충분치 않았다.

아니, 이런 하늘을 두고 어떻게 아무런 감흥이 없을 수 있을까. 나는 마음껏 감탄하기로 했다.


내리막길의 끄트머리에서 퍼걸러를 발견했다. 평탄한 구간이 대부분이었지만, 상당히 긴 코스였기에 조금은 지쳐 있었던 터였다.

어깨에서 가방을 내려 옆에 두고, 그대로 드러누웠다. 늦여름과 가을 어딘가를 지나고 있을 매미와 여러 풀벌레가 일제히 울어댔다.

산들바람이 어찌나 개운했던지, 하마터면 잠들 뻔했다. 바로 옆에 내려와 앉아 쉴 새 없이 재잘댔던 참새 무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이윽고 마지막 코스. 약간 언덕진 길을 넘어 호랑산이 품은 마을 쪽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주민이 자주 이용하는 등산로 구간인지, 운동 시설과 쉼터가 조성되어 있었다. 한쪽으로는 호랑산 정상으로 향하는 등산로도 뻗어 나가고 있었다. 잠시 정상을 오를까 고민했지만, 이대로 끝내는 게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개운하게, 끝까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호랑산둘레길을 마치고 싶었다.

 




정상을 밟지 않았어도, 호랑산을 즐기기에는 더할 나위 없었다.

일곱 개로 나뉜 코스는 저마다 색다른 매력을 자랑했다.

호랑산은 하나의 봉우리이지만, 전혀 다른 일곱 갈래의 숲길을 걷는 듯한 느낌이었다.

좁고 평탄한 오솔길이 이어지는 코스가 있는가 하면, 자전거도 함께 달릴 수 있을 만한 너비의 임도로만 조성된 구간도 있었다.

호랑산의 중턱에 숨겨진 숲길을 따라 거닐기도, 약간은 동네 뒷산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길도 만났다.

여러 챕터로 구성된 단편소설집의 책장을 차례로 넘겨보는 기분이었다.



▶코스 경로: 남해화학사택 - 자내리고개 - 평영동임도삼거리 - 대곡마을뒤 임도삼거리 - 봉계저수지 - 대곡마을 - 여도중학교 - 남해화학사택

▶거리 : 13km

▶소요 시간: 약 4시간 30분

▶코스 타입: 순환형

▶난이도: 보통

▶편의시설 : 코스 내 화장실, 매점이 없으니 사전 식음료 준비가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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