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김제.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의 중심지역이고, 오래 전 삼한시대부터 농경문화가 발달한 곳이다. 한때 이곳의 주인이었던 백제 시절에는 김제를 볏골이라고 불렀다. ‘벼의 고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지금도 김제 땅의 절반 이상이 논이다.남쪽 동진강 일대의 김제평야와 북쪽 만경강 유역의 만경평야를 합해서 부르는 이름이 금만평야다. 이곳 사람들이 ‘징개맹개 외배미들’ 이라고 부르는 그 들판이다. 너른 외배미들이 만경강과 만나는 물가에 외줄기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강바람, 들바람을 온 가슴으로 맞으며 걷는 길. 새만금바람길이다.
징개맹개 외배미들
김제의 북쪽에서 서해로 흘러드는 만경강과 남쪽에서 흐르는 동진강 사이의 끝없이 넓은 땅을 금만평야라고 한다. 금만평야는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거의 유일하게 하늘과 땅이 맞닿은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금만평야를 이곳 사람들은 ‘징개맹개 외배미들’ 이라고 부른다. 징개는 김제고 맹개는 만경이며 외배미는 이 배미 저 배미 할 것 없이 하나로 툭 트였다는 뜻이니 김제와 만경의 넓고도 넓은 들판이라는 뜻이다.
이곳은 청동기시대부터 논농사를 지어온 곳이다. 백제시대에 쌓았다는 수리시설인 벽골제도 아직 남아있고 김제 곳곳에서 농경문화의 흔적들이 발견된다고 한다. 문화를 뜻하는 영어단어 Culture는 라틴어 Cultura에서 온 말이라 하고 Cultura의 원래의 뜻은 ‘경작하다’라는 뜻이라 하니 예전의 문화라는 것은 농사를 짓는 것이었고 문화의 발전이라는 것도 농사를 잘 짓는 일이었던가 보다.
바람 부는 길
제방길 왼쪽은 빈 들판이고 오른쪽은 갈대의 바다다.
만경(萬頃). 이랑이 만개나 된다는 뜻이니 들판이 많은 동네의 이름으로는 제격이다. 만경들판의 중심지인 만경읍내를 빠져나가면 이내 논들이 시작된다. 사방을 둘러봐도 논, 논, 논뿐이다. 걸음을 시작하는 진봉면사무소는 만경읍내에서 5km 정도 떨어져 있다.만경강변의 제방길을 걷는 것으로 걸음을 연다.
제방길이 끝나면 나성산 숲길로 이어진다.
만경강 제방길로 올라서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모두 들판이다. 한쪽은 된서리 가득 내린 빈 들판이고, 다른 한쪽은 끝 간곳 모르게 펼쳐져 있는 만경강의 갈대밭이다. 빈 들판은 새까만 까마귀들이 차지하고 있고, 갈대밭에서는 나그네의 발소리에 놀란 백로가 후드득 날아오른다.
나그네의 앞섶을 여미게 만들었던 바람은 석치마을에서 나성산 숲으로 들면서 슬그머니 잦아든다. 길은 숲길로 계속 이어진다. 새만금 방조제 공사로 물길이 막히기 전에는 서해안을 지키는 초병들이 걸었을 조붓한 오솔길이다. 석치, 인향, 고사마을들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뒤로 하고 낙엽이 두텁게 쌓인 기분 좋은 길을 걷는다.
낙엽이 두텁게 쌓인 초병로를 따라간다.
물길은 말라가고 할 일을 잃은 빈 배는 세월 따라 삭아간다.
바다를 바라보는 절 망해사
조붓한 숲속 오솔길이 끝나면 다시 제방길이다. 둑 위에 세워진 안내판을 보니 이곳이 예전에 전선포가 있던 곳이다. 전선포는 지금의 해군기지와 같은 군항이었다. 만경들판과 전라도 북부를 지켜내던 군사요충지였으나 1920년대 일제강점기의 간척 사업으로 포구는 사라지고 작은 마을만 남아 옛날을 증언하고 있다. 전선포 제방을 건너면 점점 육지화 되어가는 갯벌로 내려서게 되고 갯벌에 자라난 갈대밭을 따라 망해사로 향한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길이 전선포 제방에서 망해사로 이어지는 길이다.
바다를 바라보는 절 망해사
만경강과 서해바다가 몸을 섞던 벼랑 위에 소박한 절 망해사(望海寺)가 있다. 손바닥만 한 자그마한 터에 극락전, 낙서전, 청조헌,종루, 요사채 등이 빙 둘러 있다. 바다를 바라본다는 망해사라는 절 이름이야 말할 것도 없고 서해를 즐기라는 낙서전이나 파도소리를 듣는다는 청조헌 등 이곳의 당우들은 모두 바다와 관련이 있는 이름이다. 그뿐이랴. 절 마당에서 보는 서쪽 수평선으로 넘어가는 해넘이는 황홀하기로 이름이 높다.
지금,바다를 보는 절 망해사의 주변 풍광은 바뀌어 가고 있다.새만금 방조제 공사의 영향이다.절 마당 바로 아래까지 들어왔던 바닷물은 점점 줄어들고 있고 갯벌로 드러난 땅에는 갈대 같은 수생식물들이 자라고 있다.수평선 너머로 지던 해는 지평선 너머로 지게 될지도 모른다.
심포항 가는 길
광활한 들판에 노을이 내리고 있다.
걸음은 망해사 뒷산인 진봉산을 넘어 심포항으로 이어진다. 진봉산은 해발 80m 가 채 안되니 산이라기보다는 언덕이다. 그래도 사방이 들판과 바다라서 상대적으로 우뚝하고 꼭대기 전망대로 오르면 시야가 일망무제로 터진다. 전망대에서 보는 들판에서 왼쪽이 만경평야이고 오른쪽이 김제평야다.
진봉산 전망대에서 본 심포항
김제평야가 있는 곳이 광활면이다. 얼마나 넓은 땅이기에 면 이름조차 광활이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 바다를 막아 간척한 곳으로 일제수탈의 현장이며 조정래 선생의 소설 아리랑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극악했던 일제수탈의 참상과 소금기 많은 땅을 옥토로 바꾸려 무진 노력한 우리네 할아버지와 아버지들의 아픈 사연이 서려있는 곳이다.
옛 명성을 잃은 심포항
혹시, 가을에 이 광활면 길을 걷게 된다면 끝없이 일렁이는 누런 황금물결 외에도 볼거리가 하나 더 있다. 소실점이 맺혀 보이는 길을 따라 가을바람에 하늘대는 코스모스가 그것이다. 더구나 해마다 여기서 벌어지는 지평선축제 기간이라도 맞췄다면 차량통행을 금지한 한적한 이 길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전망대를 내려와 계속 언덕을 넘어가면 심포항이다.
심포항 그리고 봉화산
만경강과 서해가 만나는 육지의 끝에 자리 잡은 포구가 심포항이다. 새만금 방조제가 만들어지기 전만 하더라도 심포항은 규모가 제법 큰 포구였고 조개의 집산지였다. 만경강과 동진강이 서해와 만나서 만든 갯벌에서는 죽합, 백합, 동죽, 꽃게 등이 지천으로 잡혔고, 이곳에서 전국 각지로 팔려나갔다. 그러나 새만금 간척지 사업이 진행되면서 이는 모두 옛말이 됐고, 지금은 심포항도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심포항의 내일은 또 어떻게 변해갈지.
안하마을 당산나무
새만금바람길은 심포항의 공사로 노선이 수정되었다. 심포항 끝에서 바로 봉화산으로 오르던 노선이 안하삼거리와 안하마을을 거쳐서 봉화산으로 접근하게 되었다. 봉화산 기슭에서 안하마을의 당산나무와 눈을 맞추고 산길로 들어선다. 봉화산도 해발 85m 정도라서 험하거나 높은 산은 아니다. 봉화산이라는 이름은 꼭대기에 봉수대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겠다. 이곳은 서해에 바투 붙어있던 봉수대라서 적의 접근에 따라 가장 먼저 봉홧불을 올리던 곳일 것이다.
봉화산 능선에서 본 거전마을과 금만평야
봉수라는 것은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인데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평상시에는 봉수대에 연기가 하나 오르고, 적이 국경에 나타나면 둘,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셋, 적이 국경을 침범하면 넷 그리고 아군과 교전하게 되면 다섯 개의 연기를 올렸다고 한다. 전국에서 다섯 갈래로 전해지는 봉수는 최종적으로 한양의 목멱산-남산봉수대로 모이게 되어 있었다.
바닷물이 찰랑거렸던 곳이 육지로 변해가고 있다.
봉수대부터는 내리막길이다. 험하지 않은 산길을 다 내려오면 이제는 소용이 없어진 초병들의 초소를 만난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초소 앞은 바다였겠지만 지금은 먼지가 날리는 육지로 바뀌었다. 봉화산 기슭을 따라 한 굽이 돌아서니 눈앞으로 광활면의 너른 벌판이 펼쳐진다.
새만금바람길 종점-거전마을 버스정류장
참고
1. 진봉면사무소 ~ 심포항 구간은 노선이 쉽고 안내판이 비교적 잘 설치되어 있어서 길을 놓칠 염려는 없습니다. 2. 심포항 ~ 안하마을 구간은 심포항을 빠져나가서 찻길을 따라 접근해야 합니다. 3. 안하마을 ~ 봉화산 ~ 거전마을까지는 안내판이 부실해서 ‘걷기여행길 포털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위성지도와 GPS 트랙을 이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4. 망해사와 심포항은 일몰 명소지만, 계절에 따라 일몰의 위치가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망해사 뒤편의 진봉산전망대에서 일몰을 맞는 것이 좋습니다. 5. 새만금바람길 걷기, 망해사, 심포항의 일몰여행을 계획한다면 1) 우선 여행 날짜의 망해사 일몰 시간을 알아 놓습니다. 2) 자신의 걸음 속도를 계산하여 적당한 시간에 진봉면사무소를 출발합니다. 3) 망해사까지 걷고, 일몰 위치를 파악하여 망해사에서 일몰을 즐기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진봉산전망대로 올라가서 일몰을 봅니다. 4) 일몰 후 심포항으로 내려와서 걷기를 마치고 심포항에서 저녁을 먹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