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제주의 끄트머리를 걷다 '제주올레 21코스'

2020-06 이 달의 추천길 2020-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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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끄트머리를 걷다,

'제주올레 21코스'

김정흠 여행작가


간 여러 여행지를, 공간을, 순간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선언했지만, 이 길만큼은 유난히 남다른 애정이 있다. 첫 번째 제주 여행에서 만난 제주올레의 기억이 워낙 좋아서였다. 북적거리는 성산일출봉 옆으로, 고요한 오솔길이 이어지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을 때였다. 조금 고리타분한 표현이지만, 첫눈에 반한 게 맞았다. 그렇게 입문했던 제주올레는, 지금도 자주 찾는 길이다. 제주도 여행 중 근처에서 올레길임을 알리는 간세, 빨갛고 파란 리본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이끌리는 일도 부지기수다. 그래 뭐, 나는 제주올레를 사랑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이번에는 절친한 친구이자, 동생이고, 제주에서 꽤 오랫동안 '생활 여행자'로 지냈던 신은경 작가에게 제주올레 21코스를 걷자는 제안을 던졌다. 지금도 틈만 나면 제주행 항공권을 끊는 그녀였기에, 흔쾌히 알겠다는 대답을 받았다. 그녀가 쓴 책, '해안에서 혜안'에 담긴 제주도 이야기를 들으며 제주올레 21코스를 걸어 볼 요량이었다.

활기가 가득했던 세화오일장

신은경 작가를 포함한 친구 넷이서 제주올레 21코스를 걷기로 한 날, 마침 세화오일장이 한창이었다. 뼛속까지 여행자인 우리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야 있나. 잠시 옆길로 새기로 했다. 시작도 하기 전에 말이다. 제주올레 21코스 위에 있는 건 아니지만, 흔치 않은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오일장에서는 특유의 활기가 느껴졌다. 세화나 종달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여러 수산물은 물론, 제주 각지에서 달려온 과일과 채소류도 눈에 띄었다. 오일장이 열리는 곳만 찾아다니는 상인들은 저마다의 물건을 내놓고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바다는 때때로 방파제 너머로 시원한 바람을 전하곤 했다.


시장 한구석에서 오랫동안 장사를 해왔다는 한 식당에 들러 국밥으로 든든히 배를 채우고, 길을 나섰다. 시작점이 있는 제주해녀박물관까지는 그리 멀지 않으니, 걸어서 이동해도 괜찮았다. 조금 더 걸으면 어때. 곁에 바다가 있는데. 날씨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푸른 바다, 그보다 더 짙은 하늘, 그 사이를 새하얀 구름이 수를 놓듯이 흘렀다.




제주해녀박물관 앞마당에 설치된 제주올레 21코스 시작점 안내 표지에 도착했다. 이번에도 역시 챙겨 온 제주올레 패스포트를 꺼내, 21코스 페이지에 시작점 스탬프를 찍었다. 정성스럽게, 행여나 삐뚤어질까 염려하며 조심스럽게. 제주올레를 대하는, 나만의 숭고하고도 엄숙한 의식을 거행하는 순간이었다.


올레! Let's Go

이제 준비는 끝났다. 배도 채웠겠다, 워밍업도 했겠다, 제주올레 패스포트에 도장도 찍었겠다. 간세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되었다. 길은 제주해녀박물관을 등진 채, 연대동산을 가볍게 넘는 것으로 그 서막을 알렸다. 곧이어 펼쳐지는 들판. 밭의 구획을 나누어 놓은 밭담 사이로 이어지는 길이 곧, '올레'였다.





밭담 안쪽에서는 어디선가 날아든 씨앗이 움 틔운 유채도, 아직은 그 정체를 쉬이 알 수 없는 새싹들도 자라고 있었다. 그 너머로는 제주 동부의 수많은 오름 군락이 저마다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물론 그중 제일은 한라산. 제주의 중심에 우뚝 솟아 사방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 존재에서 왠지 모를 경이로움이 느껴졌달까. 밭담이 어지러이 뻗어 나가는 듯했지만, 눈 앞에 펼쳐진 이 풍경을 곁에 두고 걷는 순간만큼은 그저 감탄사만 연신 내질렀을 뿐이었다.



한라산을 등지면, 이번에는 저 멀리에서 바다가 일렁이고 있기도 했다. 낯물밭길을 굽이굽이 훑어내던 길이 잠시 후에는 바다로 향할 예정이기도 했다. 제주올레를 상징하는 파란색 간세가, 바람에 쉴 새 없이 흩날리는 리본이 정확히 내 마음과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치 내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햇볕이 따갑게 느껴졌다. 그늘이 많지 않았던 탓이다.

그러나 쉴 새 없이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온몸을 감싸고 돌았다. 자박, 자박. 밭담 길을 따라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들려오는 발소리가 그와 어우러졌다. 바람 소리, 이따금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그게 전부였다. 이 고요한 길 위를 걷는 순간이 꽤 오랫동안 이어지기를 바랐다.


놀멍, 쉬멍, 걸으멍

우리는 제주올레의 정신을 정말이지 열심히도 지켰다. 좋은 풍경은 어김없이 우리의 포토존이 되었고, 카페는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이리저리 굽어지는 밭담길을 따라 거닐며 저마다의 이야기를 쏟아냈던 것은 물론이다. 특히 우리가 '월정댁'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20대를 월정리에서 보내다시피 했던 신은경 작가가 추자도에 얽힌 일화를 구구절절 이야기했을 때는, 다들 그녀를 위로하기도 했다. 추자도 올레를 걷기 위해 배를 탔지만, 잠에서 깨었을 때는 이미 목포항으로 향하고 있었더라는, 애통한 사연이었다.








조선 시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벽이라는 별방진 위에 올라서는 말 그대로 주저앉았다.

바다가 좋았고, 바람이 좋았다. 마을 포구인 하도항의 고즈넉한 분위기도 한몫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 사이로 우리가 걸었던 길도, 걸어야 할 길도 내려다보였다. 어선이 이리저리 오가는 모습도, 해녀들이 어구를 정비하는 모습도 그저 정겨웠다.

제주를 애정하는 이들이 자신만의 색깔을 담아 만들어 낸 독립출판물이 매력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길에서 잠시 벗어나 찾은 '언제라도'는 제주올레 21코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한, 독립서점이었다.

밖에서 볼 땐 하나의 작은 가정집처럼 보였지만, 내부에는 책이 빼곡했다. 제주를 애정하는 이들이 자신만의 색깔을 담아 만들어 낸 독립출판물이 매력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누군가는 제주에서 사랑을 했고, 누군가는 제주에서 방황을 했으며, 누군가는 제주에서 새로운 시선을 얻었단다. 길 위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 낸 엽서 등 여러 기념품에서도 제주가 가득 묻어났다.

 


책을 하나 골랐다. 신은경 작가의 <해안에서 혜안>이었다.

그녀와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음에도, 책을 제대로 읽은 기억이 없어서다(미안하다). 물론 아까 이야기했던 '추자도' 사건의 전말이 실려 있다는 그녀의 영업이 통했다는 것도 부정하지는 않겠다. 바닷가에 놓인 한 현무암 테이블에 앉아 책을 펼쳐 들었다. 사진 한 장 없이 제주에서 경험했던 여러 일화, 바다를 바라보며 품었던 생각을 담담하게 적은 그녀의 '혜안'에 공감하기도, 함께 웃기도 하며 읽어 내려갔다.


다시 길을 나서다






다시 길을 나섰다.

하도해변까지는 탁 트인 바다를 곁에 두고 걷는 길이었다. 마음마저 청량해졌다. 오늘따라 유난히 잘 보이는 토끼섬과 우도를 바라보면서 한참 수다를 떨었다. 이 길을 물 들이는 수국도, 문주란도 아직이었지만, 바다만큼은 유난히 짙은 에메랄드빛을 뽐내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우리의 발걸음은 꾸준히 나아갈 줄을 몰랐다. 이건 전부 제주올레 21코스가 품은 모습 탓이었다. 그게 제주올레의 매력이기도 하고. 하도해변도 마찬가지였다. 바다는 마치 물감을 뿌려놓은 듯한 색감을 자랑했다. 물 빠진 해변을 따라 이리저리 걷기도, 멀찍이 떨어진 누각에 앉아 바닷바람을 즐기기도 했다. 우리의 바다 감상법은 제각각이었다.

지미봉, 그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절경






지미봉은 제주올레 21코스의 하이라이트이자, 가장 힘겨운 구간이었다. 그러나 제주올레에서 보상 없는 오르막은 없다고 했던가. 20여 분의 등산로를 견뎌내자, 제주 동부가 사방으로 펼쳐지는 장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미봉 정상에서 펼쳐지는 풍경은 그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절경이었다. 동쪽 바다로는 우도와 성산일출봉이, 서쪽으로는 동부 오름 군락과 드넓은 들판, 한라산까지 조망할 수 있었다. 그렇게 지미봉 정상에서도 한참이나 풍경을 감상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지미봉에서 내려왔을 즈음엔 이미 해가 기울어지고 있는 무렵이었다.

한라산의 능선을 타고 넘어와 종달 바당(바다를 뜻하는 제주어)에 부서지며 반짝이는 햇살이 반가웠다. 제주올레 패스포트에 도착지점 스탬프를 찍었고, 마지막으로 바다에 다가가 윤슬을 마주했다.


제주올레 21코스는 끝났지만, 근처에 서점이 하나 더 있다는 신은경 작가의 말에 우리는 그곳까지 찾아가 보기로 했다. '소심한 책방'이라니. 이름이 꽤 마음에 들었다. 앞서 방문했던 '언제라도'보다는 규모가 컸지만, 여전히 독립서점 특유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이 서점을 채울 책들을 직접 골랐을 주인장은 몇몇 서가에 코멘트를 달아두기도 했다. 말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한 서점이었지만, 마치 누군가와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곳에서도 몇 권의 책을 샀다. 표지 한 번 펼치지 않아도, 마음이 든든해지는 기분이었다.


​▶코스 경로: 제주해녀박물관 - 연대동산 - 별방진 - 해안도로 및 석다원 - 토끼섬 - 하도해수욕장 - 지미봉오르는길 - 지미봉 정상

-종달바당

▶거리 : 11.3km

▶소요 시간: 3시간 30분

▶코스 타입: 비순환형

▶난이도: 중 / 지미봉을 제외하고는 모두 평탄한 길

▶편의시설

화장실 :해녀박물관 야외화장실

식수: 해녀박물관 뒷쪽 하도 운동장 음수대 외 1곳

매점: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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