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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영광] 그 가을, 불갑사를 거닐며, 영광 불갑사길

2020-11 이 달의 추천길 2020-11-30
조회수1,447

그 가을, 불갑사를 거닐며

영광 불갑사길

여행작가 김정흠


애매하다.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이한 지도 꽤 되는데, 숲은 여전히 초록빛으로 가득하니 말이다.

빨갛고 노란 기운을 조금씩 받아들이고는 있다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성에 차지 않는다.

'더 화려했으면' 하고 읊조리며 매일 창문을 열어 단풍이 얼마나 들었는지 확인하는 것도 어느새 일상이다.

그래도 가을은 가을이다. 공기는 선선해졌고, 하늘은 꽤 높아졌으니까.

이 계절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응당 두 발 벗고 나서서 기꺼이 맞이하러 나가야 하는 게 인지상정.

영광 불갑사로 향한 것은 가을을 맞기 위함이었다.


B를 꼬드겼다. 가을의 곁을 따라 걷기나 하자고. 흔쾌히 알았단다.

마침 심심했다고. 마침 가을이 보고 싶었다고. 요즘 머릿속이 복잡해 자연이라도 만나야겠다고.

내가 평소에 걷기를 예찬하며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기 좋다'고 말한 게 이렇게 효과를 볼 줄이야.

그렇게 그는 평일 중 하루를 기꺼이 비웠고, 우리는 출발했다.

서울에서 세 시간 반.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우리가 속세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기꺼이 투자할 수 있을 만한 시간이기도 했다.


불갑사 입구에 도착했다. 이 일대에 지천으로 널려 있다는 꽃무릇은 이미 저물고 없었다. 대신 다른 풍경이 우리를 맞이했다.

가로수는 물론, 불갑사를 감싸고 있는 산까지 노랗고 붉은 기운으로 한껏 물들어 있었다. 완연한 단풍은 아니었지만 괜찮았다.

이토록 아름다운 가을인데. 기대치 않았던 선물을 받는 느낌이었다.




두 그루의 거대한 나무 기둥을 그대로 쓴 일주문을 지났다.

한껏 가벼워진 마음으로 불갑사 경내를 산책했다. 오가는 이 하나 없이 고요한 풍경이었다.

되도록 천천히, 깊게 이 공간을 마주하기로 했다. 우리는 말이 없었다. 뭐, 괜찮았다. 적막은 아니었으니까.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또 내었다. 풀벌레 소리와 바람 소리, 새들의 노랫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저 멀리서는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같기도 했다. 착각일지도.






경내로 진입하는 길은 꽤 곧은 편이었지만, 우리의 발걸음은 갈지 자를 그렸다.

길과 길 사이를 흐르는 계곡, 사방으로 솟은 산, 부드러운 능선, 독특한 건축물이 차례로 등장했고, 우리는 여지없이 그 유혹에 넘어갔다.

꽃무릇이 피는 시기에는 언제나 사람이 넘쳐나는 곳이었을 테니, 꽃 한 송이 없는 지금 이 순간이 도리어 다행이었다.

아무도 없는, 그렇기에 더욱더 푸근한 공간들을 기꺼이 향유하기로 했다.




불갑사는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오래된 사찰 중 하나다.

인도 간다라 지방 출신의 고승 마라난타가 호남 지역, 그러니까 당시 백제에서 처음으로 창건했다는 절이 바로 불갑사다.

그게 384년의 일이니, 천 년을 훌쩍 뛰어넘은 고찰인 셈이었다.

이토록 오랜 역사를 품은 곳이라면 으레 화려할 법도 한데, 불갑사는 그렇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서 오롯이 본연의 모습을 지키고 있는 듯했다.




불갑사는 문화재가 많은 사찰이기도 하다.

사천왕상과 만세루, 대웅전 등등 여러 건축물과 조형물, 불상들이 조선 시대에 만들어졌다.

특히 대웅전은 보물 제830호로 지정된 건축물이다.

불단이 정면을 향하지 않고 꿋꿋이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 지붕 위 용마루 중앙에서 보탑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정면과 남쪽의 창호에도 화려한 꽃살문과 교살문이 담겨 있었다.

내부에서는 불단 위에 설치된 닫집의 정교한 조각들을 만날 수 있기도 했다.





구석마다 다른 볼거리들도 많았다.

경내 한가운데 올곧게 자리한 은행나무는 조만간 샛노랗게 물들 것처럼 한껏 힘을 주고 있었다.

질서정연하게 만들어진, 그러나 저마다의 매력을 품은 전각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모습들도 묘하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풍경이었다.

그러다 마주친 굴뚝. 사람 얼굴 모양을 한 굴뚝은 스님들의 유머 감각에서 비롯된 걸까. 한참을 웃었다.

그렇게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면,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면 성공이었을 테지.




이제야 불갑사를 벗어났다. 그나마도 내가 불갑사의 분위기에 흠뻑 젖어 든 B를 재촉한 것이었다.

해가 지기 전에는 불갑사길을 따라 불갑저수지에 있는 수변공원까지 거닐어 볼 요량이었다. 부쩍 짧아진 해를 원망했다.

수변공원과 내산서원까지 잇는 길까지 한 바퀴를 빙 두르는 길이 조성되어 있었지만, 대부분 공사 구간이라는 점이 발목을 잡았다.

마음대로 코스를 바꾸기로 했다. 이 목가적인 풍경만큼은 그대로일 테니 걱정은 없었다.

마침 불갑천을 따라 소소하게 산책로가 있었다.






수확을 막 끝낸 논이 사방으로, 그 끝에는 지평선 대신 야산이 쭉 이어졌다.

전형적인, 그래서 더 편안하게 느껴지는 시골 풍경이었다.

사실 걷는 건 핑계였다. 그간 쌓아 두었던 근황 이야기를 풀어냈다.

누구나 그렇듯이 분명 쉽지 않은 삶이 이어졌고, 고민이 많아졌으며, 해결책은 요원한, 그런 주제들이 오고 갔다.

결론은 항상 같았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불갑사길' 옆으로 흐르는 불갑천은 꾸밈없이 정갈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앙상한 벚나무 가로수들이 내년 봄 풍경을 상상하게 했지만, 지금 모습이어도 괜찮았다.

조금 일찍 이파리가 떨어져 버린 게 아쉽기는 했다만.

미적 감각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단순히 실용적인 용도로 설치한 다리가 왠지 모르게 이 풍경에 어울렸다.

발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작은 습지에 조성된 영광불갑테마공원 한가운데 쉬어가기에 적당한 정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다른 나무와 풀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덕에 적당히 고요하기도 했다.

가방을 옆에 내려두고, 그대로 드러누웠다.

눈을 감고, 두 팔을 양 끝을 향해 뻗었다. 입은 쉬지 않았다.

우리의 이야기는 개인에게서 사회로, 사회에서 정치로, 다시 일상으로, 과거로, 미래로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이야기가 실타래처럼 이어졌다.

공간에서 시간으로, 시간에서 사람으로.

친구와의 이야기가 늘 그러하듯이 방향성은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불갑저수지 어귀에 들어섰다. 이제야 인도가 나타나 조금은 편하게 걸을 수 있었다.

불갑저수지는 광주, 전남 일대에서 단연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저수지다.

주변 농지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1926년에 조성했다는 이곳에는 그저 수변공원 정도만 있을 뿐이었다.

차라리 그편이 나았다. 이 평온한 공기를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물이 일렁였다.

그 위로 햇볕이 부서지며 한껏 반짝이고 있었다.








B는 다시 주저앉았다.

얼마나 걸었다고 그러는 것이냐며 핀잔을 주려다가 말았다. 운동하려는 건 아니니까.

그는 가방 속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맥주 캔을 하나 꺼내 들었다.

드넓은 불갑저수지를 바라보며 시원하게 한 모금. 사실, 출발하기 전에 그에게 맥주 한 캔을 준비하라고 권한 건 나였다.

응어리를 툭 털어버리기에, 이보다 더 좋은 아이템이 없었다. 적어도 그에게는 말이다.



해가 기울어가고 있었다. 서두를까 했다가 그러지 않기로 했다.

저수지 옆을 따라 걷다가, 다시 등장한 도로를 보고는 불갑천 옆 인도로 몸을 피했다.

그리고는 다시 쭉. 우리의 말 수는 점점 줄었다. 힘들어서 그렇다기보다는, 잠시 쉬어간다는 느낌이 더 컸다.

추수를 끝낸 들판에서는 황량하다기보다 왠지 모를 안도감이 느껴졌다.

무사히 잘 끝냈겠구나, 하는. 유난히 부침이 많은 한 해였으니까.

그래,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결국은 다 잘 될 것이리라. 이 들판처럼.

* 불갑사 입구에 넓은 주차장이 있으며, 주변에 상가가 모여 있다.

* 불갑사 일원, 영광불갑테마공원, 불갑저수지수변공원, 내산서원 등에 공중화장실이 있다.

* 길 대부분에 인도가 없다. 불갑사와 영광불갑테마공원 사이에서 큰 공사가 진행 중인 터라 덤프트럭이 자주 오가기도 한다. 도로를 우회해 불갑천을 따라 걸어 올라가는 것을 추천한다.

* 불갑저수지수변공원 이후 코스에도 공사 중인 구간이 많다. 공원까지만 걷고 되돌아가는 것을 추천한다.

* 불갑사 경내에 영광산림박물관이 있다. 잠깐 둘러보기에 적당하며, 무료로 관람이 가능하다.


▶코스 경로: 불갑사 - 불갑사 관광단지 - 내산서원 - 박관현열사 동상 - 불갑저수지 수변공원

▶거리: 15km

▶소요 시간: 5시간

▶코스 타입: 순환형

▶난이도: 보통

▶편의시설

화장실 : 코스 내  5개소

식수: 화장실이 있는 구간은 식수시설이 갖추어져 있음

매점: 불갑사 관광지구와 수변공원에 갖추어져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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