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마흔이 되면 오토바이를 하나 사서 세계일주를 하고 싶다고 했다 . 어쩌면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의 여행을 꿈꿨을지도 모른다 . 여행은 삶의 비상구처럼 슬쩍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라고도 했다 . 그런 그가 1996 년 1 월 6 일 , 만 서른 두 해의 나이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 할 여행을 떠났다 . 그리고 ... 스물 두 해가 흘렀다 . 우리는 여전히 그를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 싱긋 웃던 소박하고 사람 좋은 웃음을 기억하고 있다 . 지구별에 잠깐 왔다 돌아간 영원한 가객 , 김광석을 그리러 달구벌로 간다 .
달구벌 그리고 대구 기원전 1 세기 경 대구에는 ‘ 달구벌국 ’ 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고 하며 , 대구의 다른 이름 달구벌은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 ' 대구 ( 大丘 )' 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신라 경덕왕 시절부터다 . 달구벌은 넓은 벌판이라는 뜻이고 , 대구도 큰 언덕이라는 뜻이니 결국은 같은 이름이다 . 신라와 고려를 지나 조선시대까지 대구는 ‘ 大丘 ’ 로 표기했다 . 조선 영조시절에 ‘ 丘 ’ 자가 공자의 이름 글자이므로 다른 글자로 고치자는 상소가 있었고 , 이후 ‘ 大丘 ’ 와 ‘ 大邱 ’ 가 혼용되다가 철종 이후 ‘ 大邱 ’ 로 정착되었다 . ‘ 丘 ’ 와 ‘ 邱 ’ 모두 언덕이라는 뜻이니 이름이 주는 의미는 바뀌지 않았다 . 대구광역시 중구는 조선시대에 경상감영이 설치되어 있던 곳이다 . 당연하겠지만 대구는 이곳을 중심으로 성장하였고 , 산업화사회로 접어들어서도 대구 발전을 이끈 원도심지역이다 . 오랜 역사를 가진 지역답게 품고 있는 문화유산이며 , 골목마다 녹아있는 이야기가 많은 곳이다 . 중구에서는 이런 문화유산과 이야기들을 엮어 답사여행길을 만들었는데 , 그것이 ‘ 중구골목투어 ’ 이다 . 경상감영길 , 근대문화골목 , 패션한방길 , 삼덕봉산문화길 , 남산 100 년향수길 등 모두 다섯 코스로 되어있고 각 코스마다 각각 다른 색깔을 보여준다 . 중구골목투어 네 번째 코스가 ‘ 삼덕봉산문화길 ’ 이고 이 길 중간에서 김광석을 만날 수 있다 .
달구벌의 중심을 걷다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걷기 시작하는 곳은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이다 . 국채보상운동이란 일제강점기이던 1907 년부터 1910 년까지 나라가 진 빚을 국민들이 갚아서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자는 취지로 일어난 국권회복운동이었다 .
서상돈 선생(왼쪽)과 김광제 선생. 담배를 끊어 나라 빚을 갚아 나가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하신 분이다.
19 세기 말부터 제국주의 열강은 피식민지국가에 엄청난 규모의 빚을 지게하고 그를 빌미로 지배력을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다 . 우리나라도 일본의 교묘한 정책과 강요에 휘말려 막대한 외채가 있었다 . 당시 일본에 진 빚은 1,300 만원 이었는데 , 이는 대한제국의 일 년 예산에 해당하는 큰 돈 이었다 . 일본에 진 빚으로 나라가 망할 위기에 놓이자 민초들이 중심이 되어 국채보상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
이 길이 끝나는 곳에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이 있다.
남자들은 술과 담배를 끊어 절약한 돈을 기부했고 , 여자들은 반지와 비녀를 내어놓았다고 한다 .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계층에서 참여하였는데 기생과 걸인은 물론이고 도적까지도 의연금을 냈다고 전해진다 . 우리의 국채보상운동은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서 ‘ 국채보상운동기록물 ’ 이 2017 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
한국은행 화폐전시관
앞에 보이는 붉은 건물이 사적 제443호로 지정된 구 도립대구병원 건물이다.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을 돌아 나와 걸음을 옮긴다 . 이내 만나는 곳이 한국은행 대구경북본부인데 이곳에 화폐전시관이 있다 . 잠깐 시간을 내서 들러볼만한 곳이다 . 한국은행과 대각선 방향에 경북대학교병원이 있는데 이 병원의 정문 격으로 쓰이는 건물이 사적 제 443 호로 지정된 옛 도립대구병원 건물이다 .
삼덕마루는 어린이들에게 특히 인기 있는 곳이라고 한다.
이리저리 골목을 지나 삼덕동 주택가에서 삼덕초등학교 옛 관사건물을 만난다 .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일본식 주택인데 현재는 ‘ 삼덕마루 ’ 라는 이름으로 주민들을 위한 도서관과 커뮤니티 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다 .
아 ! 김광석
삼덕동에서 달구벌대로를 건너면 방천시장이다 . 방천시장 앞으로 흐르는 냇물이 대구 도심을 동서로 가르는 신천이다 . 신천 제방을 따라 열린 시장이라 하여 방천시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 방천시장은 점포 수가 1,000 개를 넘을 정도로 활기가 있던 대구의 대표적인 재래시장 중 하나였다 .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시장은 쇠락해 갔는데 2009 년부터 방천시장 재생 프로젝트를 시행했고 , 그 일환으로 방천시장과 신천 제방 사이의 골목에 ‘ 김광석 다시 그리기길 ’ 을 만들었다 . 김광석은 방천시장이 있는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 ‘ 김광석 다시 그리기 ’ 는 ‘ 그리워하면서 ( 想念 , Miss) 그린다 ( 畵 , Draw)’ 라는 중의적인 의미라고 한다 .
골목 입구에서 ‘사랑했지만’을 부르고 있는 김광석
김광석 다시 그리기길에서는 김광석을 그리는 공연이 끊이지 않는다
골목 입구에서 사람들을 맞이하는 것은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는 김광석이다 . 그의 노래 ‘ 사랑했지만 ’ 후렴구를 부르는 모습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태어난 골목길을 걸으며 그를 그린다 . 그가 활짝 웃고 있는 모습 ,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모습 , 그의 노래 중 한 장면을 그린 모습 , 오토바이에 올라앉은 모습 . 그림들을 보고 있으니 그가 그립다 . ‘ 김광석 다시 그리기길 ’ 은 350m 가 채 되지 않는다 . 이대로 골목을 빠져나가려니 너무 아쉽다 . 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 걷는다 .
김광석 다시 그리기길의 그림들
환하게 웃으며 노래를 하고 있는 그의 동상 옆에 앉는다 .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 그가 살아있다면 올해가 만으로 쉰 넷인데 ... 중년이 된 그는 어떤 모습일까 ? 여전히 사람 좋은 웃음을 달고 있을 것이고 , 아마도 소극장 공연은 3,000 회를 넘겼을 것이다 . 마흔 즈음에는 가죽바지에 체인을 두른 채 오토바이를 타고 세계일주를 했을까 ? 환갑의 로맨스는 여전히 유효할까 ?
저들은 어떤 이야기를 쓰고 있을까?
김광석에게 묻고 싶다. 그곳에서도 여전히 노래하느냐고...
이제는 그의 고향 골목을 빠져 나가야 하는데 ... 길은 계속해서 대구향교와 건들바위 역사공원으로 이어지는데 ... 아직 그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다 . 길가의 작은 찻집으로 들어가 창가에 앉는다 .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그의 노래 ‘ 서른 즈음에 ’ 를 부탁한 후 의자 깊숙이 몸을 묻는다 .
또 하루 멀어져 간다 .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 만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 (1km) 삼덕동문화거리 ~ (1km) 김광석길 , 방천시장 ~ (1.6km) 봉산문화거리 ~ (0.7km) 대구향교 ~ (0.7km) 건들바위 역사공원 ( 5km, 2 시간, 난이도 쉬움) *순 걷는 시간 . 답사시간 , 간식시간 , 쉬는 시간 등은 포함하지 않음
찾아가기 - 지하철 : 지하철 1 호선 중앙로역 2 번 출입구로 나와서 종각네거리 방향으로 700m 정도 걸으면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이다 . 지하철 2 호선 경대병원역 1 번 출입구로 나와서 종각네거리 방향으로 650m 정도 걸으면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이다 . - 버스 :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앞까지 오는 버스 306 번 / 403 번 / 805 번 / 323-1 번 돌아오기 - 마치는 곳인 건들바위 역사공원 부근에 지하철 3 호선 건들바위역이 있고 버스정류장도 있다 . - 차를 가져가는 경우라면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지하에 공영주차장이 있다 . 1 일 주차에 6,000 원이다 .
화장실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 국채보상운동기념관 , 한국은행 화폐전시관 , 경대병원 , 삼덕동 주민센터 , 김광석길 , 봉산문화회관 , 대구향교 등 걷는 길에 화장실은 불편하지 않다 . 음식점 및 매점 전 코스가 도심 구간이어서 걷는 길 주변에 음식점과 매점이 많다 . 숙박업소 걷는 길에는 숙박업소가 없지만 주변 1km 내에 숙박업소가 많이 있다 . 코스 문의 중구 관광자원과 053-661-2624
글, 사진: 김영록( 걷기여행가, 여행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