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란 게 그렇다. 그저 그렇게, 제갈 길에 뻗어있는 듯 해도 아니다. 잘 보면 `날'이 있다. 날 세워 내치는 길이 있는가 하면, 옆면으로 둥글게, 가만히 포용하는 길도 있다. 걷다보면, 어, 사람다니는 길인데, 자전거에 눈길을 준 길도 있고, 아예 자동차랑 사랑에 빠진 길도 있다. 그러니 그립다. 이 가을 오롯이 `사람'을 위해 날을 거둔 배려의 길. 그런데, 놀랍다. 머지 않은 도심 한복판에 이런 길이 있다. 게다가 `서울의 허파'로 불리는 남산. `북측순환로'로 알려진 이 길, 무디다. 날을 거둬 포용하는 이 배려의 길엔 그래서 포용이 있다. 거두고, 받아들이는 가을을 닮은 포용이다. 3420m짜리, 길고 깊은 가을의 울림이 있는 길이다.
가을을 닮은 무장애길
남산북측순환로 입구 안내소. 여기서부터 3킬로 남짓 순환로가 이어진다
남산순환나들길 북측순환로. 시작점은 남산케이블카 승강장 위쪽 건너편, 남산공원 입구 안내센터다. 오롯이 사람을 위한, 배려의 길, 시작점이다. 이 안내센터에서 와룡묘을 거치고 남산골 한옥마을 입구를 지나 국립극장까지 가는 3.4㎞ 길이의 탐방로. 원래는 차가 다니던 `날'선 길이었는데, 91년 자동차 출입을 전면 금지하면서 날을 감춘다. 그 뒤엔 자전거도 막는다. 사람을 위한, 무딘 배려의 산책길로 바뀐 게다. 바닥에도 날을 거둔다. 턱을 없애고, 계단을 깎고 각을 없애 무장애길로 변신한다. 장애인, 유아까지 휠체어어나 유모차에 앉아 가을 단풍 절경을 함께 만끽한다.
남산순환로는 안전하다. 위급시 언제나 신고를 할 수 있는 위치표시(왼쪽). / 남산순환로 곳곳엔 쉬어갈 수 있는 나무의자들이 놓여있다
이쯤만 해도 대단한데, 이 길, 한술 더 뜬다. 길 가운데로 올록볼록 노란 블록이 보인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유도 블록이다. 1㎞ 마다 이어지는 장애인 화장실에, 갈림길과 핫스폿에는 음성유도기도 꼼꼼히 마련돼 있다. 눈으로 못보는 남산 풍광, 가슴으로 느끼라는 배려다.
이러니 이 길, 가을을 닮은 길이다. 가을은 응축의 계절이다. 숨기고, 거둬 들린다. 그렇게 사람을 포용하고 받아들인다.
사실 남산엔 둘레길만 다섯이다. △북측순환로 △산림숲길 △야생화원길 △자연생태길△역사문화길까지 남산 허리춤 9.1㎞를 애두른다. 이중 가장 가을을 닮은 길은 길이, 북측순환로, `쉽게 걷는길' 구간인 셈이다.
이 길은 그러니 사람에게만 열린 길이다. 뛰는 사람은 뛰어가고 걷는 사람은 걸어간다. 앉아서도, 지팡이를 짚고서도, 눈을 감고서도 간다. 가을을 몸에, 눈에, 가슴에, 담고 가는 새김의 길이다.
조지훈 시비와 와룡묘
남산의 가을
이 길이 마음에 드는 건 하나다. 배려의 길, 가을을 닮은 길이라 구구절절 풀어 놓았지만 다 필요없다. 짧다. 시작부터 3.4㎞. 정말이지, 어어 하다보면 길의 끝이다. 그러니 지루할 틈도 없다. 인근 직장인들은 아예 점심을 건너 뛴 뒤, 훌쩍 한바퀴를 돈다. 그야말로 총알 힐링로드다.
단풍 절정은11월 중순께다.케이블카 승강장 입구까지 가는 루트는 여럿이다.개인적으론`남산오르미'를 강추한다.강남에서 강북으로3호터널을 나와 불과100여m만 내려오면 오른편에 있는 명물이다.사선으로 케이블카 승강장까지 이어지는 몇 안되는 사선형 엘리베이터다.내린 뒤에는 길만 건너편 북측순환로 입구다.
무장애길 명소 답게 늘 눈에 띄는게 시각장애인 전용 택시다.이 길을 걷는 장애인이 평일에는 하루300명이 넘고 주말에는 하루1000명이 넘는다.
이맘땐 낙엽이 밟힌다. 그 바삭거림이 좋다. 길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건 바닥 주의 그림. 자전거 금지, 인라인 금지, 흡연 금지, 마지막이 개목줄 풀기 금지 그림이 앙증맞게 그려져 있다. 10여m쯤 위에는 파란색 바탕에 `배려의 길'이라는 문구가 연이어 보인다. 배려의 길, 지킬 건 지켜달라는 의미다.
절대 조심해야 하는 남산순환길 4가지.
목멱산방의 가을
1분여쯤 걸으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게 목멱산방이다. 언뜻 보면 `남산에 왠 고급 한정식집?'하시겠지만 오해다. 겉으로는 고급 한옥집인데, 반전이다. 실제로는 고품격 저가격의 메뉴로 정평이 나 있다. 게다가 고집도 있다. 고품질 저가격, 무화학 조미료, 직접 조리, 족보 있는 먹거리, 정성과 사랑이라는 5가지 원칙이다. 요즘 `핫'해진 건 순전히 미디어 덕이다. 예능 프로그램 수요미식회와 함께 미쉐린 가이드 서울편에 소개가 되면서 평일에도 사람들이 몰린다. 특히 수요미식회에서 소개된 불고기 비빔밥과 육회 비빔밥은 단연 인기 메뉴.
산방을 지나면 이내 왼쪽편에 높이 2m 남짓한 비석 하나를 만난다. 조지훈 시비(1971)다. 어린 아이들이 신기한지 연신 비석을 만져대고 있다. 앞면엔 대표작 파초우가, 뒷면엔 일대기가 간략히 기술돼 있다.
`외로이 흘러간 한송이 구름/이밤을 어디메서 쉬리라 던고/성긴 빗방울 파초잎에/후둘기는 저녁 어스럼/창열고 푸른산과 마조 앉아라/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온 아침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이밤을 어디메서 쉬리라 던고'
아무리 바빠도, 필히 심호흡 한번하고, 파초우 한수 읊고 가시라. 이런 게 남산 하고도, 가을의 `쉼표'다.
와룡묘. 중국 삼국시대 정치인 제갈량을 모신 묘사.
산방을 넘어서면, 와룡묘다. 단풍이 절정인 이맘때 이곳은 최고의 SNS 인증샷 포인트다. 와룡묘는 제갈공명의 사당이다. 중국 한이 무너진 혼란기, 유비를 도운 인물이 공명이다. 철문은 굳게 닫혔는데, 쪽문은 열려있다. 홍살문을 지나면 왼쪽 언덕에 `목멱산' 와룡묘라고 새긴 표석을 볼 수 있다. 사당까지는 가파른 계단이 오르막으로 이어진다. 단풍 터널을 따라, 새어드는 빛. 카메라 셔트를 누르는 족족, 작품이다.
어떻게 이곳에 제갈량 사당이 있을까. 이곳을 지나는 산책족, 누구나 이런 의문을 품는다. 구한말 엄상궁이 지었다는 설이 있는데,설은 설일 뿐이다.
중간반환점 한옥마을 갈림길
와룡묘를 지나면 본격적인 산책 구간이다. 날을 없앤, 둘레길의 무딤을 담담하게 몸으로 느껴봐야 한다. 업다운 심한 자연생태길이나 제법 숨이 찬 신림숲길과는 달리 북측 순환로는 수평의 길이다. 모가 없고 날이 없다. 게다가 열려 있다. 구간 구간 지루하면 옆길로 새면 된다. 리라초로 아랫길로, 빠져도 되고 서울유스호스텔길로 나가도 된다.
산책길 중앙은 노란색 유도블록이다. 가을 초입, 게다가 평일 오후인데도,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여럿 보인다. 시각장애인들은 더듬더듬 유도블록을 짚어가며 가슴으로 단풍색을 느낀다.
위안부 기억의 길 가는 초입의 쉼터
10~15분 쯤 더 걸으면 묘한 갈림길 하나가 나온다. `300m - 기억의 터'라는 푯말이다. 여유가 있다면 이 곳 만큼은 찍어야 한다. 1910년 한일합방 조인을 했던 아픈 `기억의 터'. 그 자리에 위한부 할머니들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기억의 터'를 마련해 놓은 자리다.
이곳을 지나면 중간 반환점 같은 한옥마을 갈림길을 만난다.
남산의 가을
왼쪽 아래쪽으로 서울시청 남산별관을 지나 구름다리 하나를 넘어가면 바로 한옥마을 위쪽(뒷문) 입구다. 보통은 4호선 충무로 4번 출구로 나와 오르막길을 헉헉대고 오르며 한옥마을을 감상하지만, 이렇게 북측산책로에선 위에서 내려가며 아래쪽 입구까지 `내리막길 감상'을 하는 반전을 경험할 수 있다. 사실 이맘때 한옥마을은 숨겨진 단풍 명당이다. 정자 주변 아름드리 휘어진 단풍 아래 호수에선 연신 팔둑만한 금붕어 떼 수백마리가 몸을 비벼댄다. 산이 붉은 산홍, 물이 붉은 수홍의 단계를 넘어, 물에 비친 얼굴이 붉어지는 `인홍'이라는 극강의 단풍 체험을 한옥 앞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이니깐.
화끈한 ‘단풍 엔딩' 국립극장·장충단공원
한옥마을 갈림길
한옥마을 갈림길 직전이 고비다. 가장 가파른 구간. 수동 휠체어도 버겁다. 이곳 만큼은 도움을 받아야 한다. 유모차를 미는 부모들도 헉헉 거릴 정도다. 경사도로만 따지면 12도가 넘을 정도. 유일하게 북측 순환로가 `날'을 세우는 코스다. 그래도 잠깐이다. 오르막은 30여m 이어지는데 고개만 넘어서면 다시 내리막이다. 숨은 차도 발걸음은 가볍다. 이내 한옥마을 갈림길이 보인다. 이곳, 의외의 인증샷 핫스폿이다. 갈림길 표지석 옆에 노랑, 빨강 꽃을 따로 심었으니, 가을 단풍 남산 최고의 인증샷 포인트로 꼽을 만 하다.
필동쉼터 가기전엔 꽤 넓은 쉼터 하나가 숨어 있다.
가볍게 마지막 종점을 향해 발을 뗀다. 전반적으론 경쾌한 내리막이다. 힘들다면 `필동쉼터'에서 잠시 쉬어가도 좋다. 단풍 터널 한복판에 정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인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공식' 쉼터라 복잡하다. 오히려 필동쉼터 50m 쯤 전 우측켠으로 보이는 간이쉼터가 훨씬 더 넓고 운치가 있다.
석호정. 국궁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필동쉼터 지척이 석호정이다. 도심에서 활을 쏠 수 있는 몇 안되는 명소다. 평일에도 까마득히 보이는 검은 과녘을 향해 활시위를 당시는 궁사들이 꽤 된다. 최근 예능프로그램 `1박2일'에서 정준영, 차태현, 데프콘이 국궁 수업을 이곳에서 받으면서 꽤나 유명세를 타고 있다.
동대 가는 길
석호정을 지나면 국립극장까지 한달음이다. 아쉬움이 남아 오히려 동국대학교 쪽으로 800m를 내려가는 마무리 코스를 택했다.이게 반전이다. 의외의 보석같은 가을 길이다. 계단길을 따라 내리막 경사면을 내려가는 다이내믹 함도 있는데, 중간중간 오래된 고목들이 나무 터널을 만들어 내는 구간도 매력적이다.
장충단 공원
마지막 방점을 찍는 장충단공원 역시 가을 단풍의 숨은 포인트다. 장충단 공원을 나가자 마자 만나는 3호선 동대역, 역사. 계단길 아닌 에스컬레이터가 반긴다. 마지막까지, 걷기에 지친 이들을 위한 눈물겨운(?) 배려. 그야말로 완벽한 가을 ‘단풍엔딩’이자 ‘배려엔딩’이다.
교통편 대중교통 명동역3번, 4번 출구로 나와 남산케이블카까지 걸어가면 된다. 도보15분.충무로 역으로 나왔다면2번과5번 남산 순환 노랑버스를 타면 된다.
TIP
길 찾아가기 찾기 쉽다.시작점은 남산케이블카 승강장 건너편 순환로 입구안내소다.승강장 바로 건너편엔`남산3길'입구가 있다.바로 오르막으로 연결되는 이 길은 정식 입구가 아니다.예서 조금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바로 안내소다.걷기 전에 안내소에서`남산둘레길'지도를 받으면 다섯가지 테마의 남산 둘레길 지도를 무료로 받아볼 수 있다.그래도 헷갈리면 여행길 포털 사이트에 있는 위성지도 또는GPS트랙을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서울유스호스텔 우회로=유스호스텔쪽에서 진입하는 구간도 있다.순환로3분의1지점과 만난다.이 인근이`기억의 터'다.미리`기억의 터'를 둘러보고 북측순환로로 진입할 수 있다. *남산골 한옥마을 우회로=남산골 한옥마을에서도 중간진입이 가능하다.한옥마을 남쪽(위쪽)뒷문으로 나와 구름다리를 건너 서울시청 남산별관으로 올라가면 된다.북측순환로2분의1지점이다.필동쉼터와 석호정이 지척이다. *동대 장충공원 우회로=장충공원에서 역으로 남산케이블카의 순환로 입구까지 걸어가기에 안성맞춤이다.다만 장충공원을 가로질러,동대 상록원 윗길로 올라갈 때 가파른 계단길이라는 게 힘들다.가파른 경사로 구간이300m정도 이어지는 구간. 음식점 및 매점 시작점인 남산케이블카 인근 소파로 `왕돈가스'골목이 맛집 포인트다. 이름하여 `남산 돈가스'. 옛날식 스프는 기본. 바삭하게 튀겨낸 뒤 달짝지근한 소스를 뿌려준다. 밑반찬이 깍두기와 김치, 풋고추와 된장이다. 돈까스일지, 생선일지 정하지 못했다면 반반 메뉴를 강추. 코스 문의 남산공원운영과 (02)3783-5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