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중에는 길이 이야기를 걸어온다. 그걸 알아차리고 귀 기울일 때 길의 의미가 확장되고 깊어지는데 나의 무지함으로 못 알아 들을 때가 많아 속상하다. 길과 소통하기 위해 걷기 전에 그 길이 품은 사연들을 미리 알아두는 것이 크게 도움 된다.
그래서 평화누리길 2코스 조강철책길을 걷기 전에 몇 가지를 알아봤다. 총 거리가 8km인데, 김포시에서 가장 높다는 문수산(376m)능선을 넘어 한때 서해에서 한성으로 드나들던 배들이 물때를 기다리며 정박하던 조강리마을을 거쳐 애기봉 입구까지 간다.
문수산에서는 150년 전 프랑스 함대와의 격전지였던 문수산성에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엄혹한 시절을 되짚어 볼 수 있는데,이 길을 먼저 걸었던 이들은 문수산성 남문에서 문수산 오르는 길이 부서진 잔돌로 가득하니 조심하라고 입을 모은다. 그래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등산스틱도 미리 준비했다.
성곽의 상승감에 날개 활짝 펴고 올라탄 문수산성 장대.
조강은 세 개의 강물을 안고 흐르는데….
조강철책길 종착점인 애기봉입구에서 외지로 나가는 마을버스가 1시간에 한 대꼴인데 그 시간 맞추기가 여의치 않다고들 한다. 그래서 애기봉입구부터 거꾸로 걸어보기로 했다. 이 역시 접근하기는 만만치 않은데 일단 지하철 송정역에서 2번 버스를 타고 1시간을 달려 하성면소재지 종점에 내렸다. 하성 종점에서 조금 걸어 나와 하성면복지문화센터 건너편 버스정류장에서 애기봉입구, 정확히 말하면 가금3리 방향으로 가는 24번 마을버스를 기다린다(24번 마을버스는 번호는 같아도 목적지가 다르므로 가금3리 마을회관을 가는지 물어보고 타야 한다). 이 버스는 매시 정각에 하성면복지문화센터 건너편 정류장을 출발하여 평화누리길 2코스 종착점인 가금3리마을회관 부근까지 운행한다.
체계적으로 잘 관리되는 경기도 평화누리길.
오가는 차 한 대 만날 수 없을 정도로 한적했던 조강리.
평화누리길 시종점에 어김없이 비치된 스템프북과 아치형 랜드마크가 있는 곳부터 길은 시작된다. 겨우내 수분을 덜어낸 갈잎이 수북하여 바스락거리던 오솔길을 걸어 작은 고개하나 넘으니 너른 조강리 들판이 열린다. 농로를 걷는 동안 오가는 차 한 대 못 보았을 만큼 한적한 조강리는 휴전선을 머리에 이고 선 마을이다. 누가 일러주지 않았다면 북쪽 2km 너머가 북한 땅인줄 꿈에도 몰랐을 고즈넉한 마을이다.
봄이 오면 수면 아래로 잠길 갈잎들. 세월에 잠기는 게 어찌 갈잎뿐이런가!
낮게 드리워 사열하듯 늘어선 문수산 소나무들. 이 길의 청신함이 남다르다.
조강은 한강이 임진강과 만나는 합수머리부터 서해 기수역까지를 부르는 호칭이다. 황해북도에서 시작해 180km를 남으로 흘러 조강에서 합쳐지는 예성강까지 조강은 모두 세 개의 강줄기가 만나 함께 흐른다.
강물도 서로 뒤엉켜 유유히 흐르고 물고기와 새들도 경계를 오가건만 사람들만 물 위에 그어놓은 선 없는 경계를 한 발짝도 못 넘는다. 조강 북쪽 개풍군에도 남쪽과 똑같은 조강리라는 마을이 있어 서로 정다웠다는 말을 들으니 더 안타까웠다.
길을 걸을 때는 길이 건네 오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안 들리면 우리가 말 거는 것으로 작전 변경!
성곽의 단단한 질서는 늘 미혹 속에 머무는 인간의 마음을 잠시 정돈시킨다.
날개 펼쳐 상승기류에 올라 탄 문수산성 장대
낚시터로 운영되는 조강저수지를 지나면 조강리 마을회관을 이용한 평화누리길 게스트하우스에 닿는다. 그리고 만나는 문수산 오르는 길의 소나무들은 솔가지를 낮게 드리워 파란 터널을 만들어준다.
문수산 8부 능선에 닿으니 문수산성 성곽과 홍예문이 버티고 섰다. 정상을 향해 가파르게 상승하는 성곽의 흐름을 시선으로 쫓아보지만 이곳에서는 정상부근이 가늠되지 않는다. 평화누리길은 이 홍예문에서 왼쪽으로 하산하지만 오른쪽으로 400m 떨어진 문수산 정상의 문수산성 장대를 안 가볼 수 없다.
염하강 너머 강화도의 산야가 아득하다.
산성은 주변의 지세와 사물의 움직임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천혜의 요지에 축성되므로 전국 어느 산성을 가든 가장 높은 곳에 세우는 장대를 꼭 가봐야 후회가 없다. 더욱이 문수산은 한성을 향하는 물길이 바다와 만나는 천혜의 길목이 아닌가!
홍예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길을 잡고 작은 언덕 하나를 딛고서니 탄성이 절로 나온다. 용비늘처럼 돋은 성곽이 능선을 따라 굽이치며 문수산 정상 장대를 향해 솟아오르고, 퇴뫼식 산성을 두른 장대는 상승기류에 올라 탄 맹금류처럼 팔작지붕을 펼쳐 성곽이 만들어낸 거대한 상승기류 위를 날아오르고 있었다. 성곽의 솟음과 장대 처마의 솟음이 거대한 문수산 화폭 위에 아름다운 선을 그려내니 한동안 감탄만 하고 있었다.
거대한 화폭에 그려진 사군자의 기품을 품은 문수산성.
자연미와 인공미가 어우러지는 정점에 있는 것이 우리나라의 산성 아닐까 싶다.
남북이 함께 흐를 날을 기다리며….
감탄사를 연발하다 그 자리에서 문수산이 들려줄 이야기를 기다렸다. 문수산성은 지금으로부터 320년 전 숙종 재위 시 왕들의 단골 피신처였던 강화도와 한성으로 향하던 물길을 지키고자 총 연장 6.1km로 축성됐다. 지어진지 170년 후 문수산성은 큰 위기를 맞는다. 조선이 프랑스 선교사들을 처형한 것을 빌미삼아 프랑스가 신식 군함들을 앞세워 무력을 행사한 것이다.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 그리고 북녘을 모두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문수산성 장대.
조선의 군대는 쇄국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이던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강력하게 대응하였고, 이때 문수산성의 해안 쪽 성벽들이 허물어지고 문루는 불타버린다. 무너진 성 안에서 프랑스의 약탈과 만행이 일삼아지던 그때를 우리는 1866년 병인양요라는 이름으로 기억한다.
그날 이후 문수산성은 그 본연의 목적을 잃어버린다. 다시 100년의 세월이 흘러 우리들은 ‘사적’이란 이름으로 비로소 문수산성을 다시 추억하기 시작했고, 성벽도 조금씩 다시 쌓아올리고 있다. 정상의 장대도 새롭게 지어 올려 작년부터 객을 맞는다.
150년 전, 저 염하강에 프랑스 군함이 닻을 내리고 이쪽으로 신식대포를 마구 쏘아대며 성벽을 부수었을 것이다. 그 시절은 가고 이제는 남북이 대치하는 세월을 건넌다. 이곳의 엄혹함은 언제나 풀리려나.
정상 장대에 오르면 멀리 동쪽에서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고 다시 예성강이 합쳐져 서해로 흐르는 조강이 한 눈에 부감된다. 이 거대한 삶의 젖줄이 남과 북을 가르는 보이지 않은 담장이 되고 말았다는 것은 참담한 우리의 현실이다. 덧붙여 언젠가 이 물길을 통해 남북이 이어져 함께 흐를 날이 오게 될 것이란다. 그때가 언제일지 모르지만 올 것이란다. 여기까지가 문수산과 조강철책길이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다.
이렇게 적다보니 말을 건네며 조잘댄 건 길이 아니라 내 쪽인 듯싶다. 늘 수다스러운 건 자연이 아니라 사람이었으니 아마 그럴 것이다. 봄이 오는지 자꾸 수다스러워진다.
문수산성 남문~홍예문~쌍용대로~조강저수지~애기봉입구(가금3리 마을회관)
(약 8km -문수산성 장대 왕복 포함 9km, 4시간 내외)
대중교통
지하철5호선(송정역) : 환승버스 8번, 88번
주차장
정식 주차장은 없으나 빈 공터에 적당히 주차한다.
화장실
청룡회관 부근, 조강리
식수
사전준비 필요
식사
문수산성 남문 부근 식당가. 종착점은 식당이나 매점 없음.
길안내
안내사인이 잘 되어 있는 편이다. 접근성과 다 걷고 나서 식사 등을 생각하면 역방향으로 걷는 것이 좋다.
문수산성 남문부터 홍예문까지 노면이 매우 불규칙하므로 등산스틱 지참을 권한다.
코스 문의
경기관광공사 (031)956-8306